잿빛곰팡이병은 한 해에 저를 두 번 곤란하게 만든 유일한 병이었습니다.봄에는 꽃이 제대로 안 맺혀서 속을 태우더니, 가을 수확 직전에는 다 익은 포도알에 회색 곰팡이가 피어서 또 한 번 속을 태웠습니다. 이름은 하나인데 얼굴은 두 개인 병이라고 느꼈습니다.잿빛곰팡이병이란?잿빛곰팡이병은 회색곰팡이병이라고도 부르며, 병원균은 보트리티스 시네레아입니다. 포도뿐 아니라 딸기, 토마토 등 수많은 작물에 폭넓게 발생하는 병원균으로, 국내외를 막론하고 가장 골치 아픈 곰팡이병 중 하나로 꼽힙니다.이 병의 특징은 발병 부위가 두 군데로 나뉜다는 점입니다. 주로 꽃과 열매를 공격하지만 눈, 잎, 신초에도 나타날 수 있는데, 저는 봄철 개화기와 가을철 성숙기, 이렇게 두 번의 다른 시기에 각각 다른 증상으로 이 병을 맞닥..
이름이 왜 새눈무늬병인지, 저는 포도알에 생긴 병반을 직접 보고서야 이해했습니다.가운데는 회백색, 바깥쪽은 갈색, 그 둘레는 보라색 테두리로 딱 갈라져 있는 게 정말 새의 눈처럼 또렷했습니다. 노균병이나 탄저병과는 확실히 다른, 유독 봄에 먼저 찾아오는 병이었습니다.새눈무늬병이란?새눈무늬병은 흑두병이라고도 부르며, 포도에서는 엘시노에 암펠리나라는 병원균이 원인입니다. 국제적으로는 이 병을 그레이프 앤스라크노즈, 그러니까 포도 탄저병 계열로 분류하기도 하는데, 국내에서는 병징이 뚜렷이 구분돼서 새눈무늬병이라는 별도 이름으로 불립니다.이 병의 가장 큰 특징은 열매에 생긴 병반 모양입니다. 병반 가운데는 회백색으로 움푹 들어가고, 바깥쪽은 갈색, 그 경계는 보라색 테두리로 뚜렷하게 갈라지는데, 이 모습이 꼭 ..
아버지가 연세가 많아 지면서 농사 짓기 힘든 샤인머스켓 포도에서 좀 손이 들 가는 품종으로 변경을 했었습니다.그 품종이 캠벨과 거봉입니다. 그런데 같은 밭, 같은 날 심은 나무인데 캠벨얼리 쪽만 잎이 누렇게 떨어지고 옆에 거봉은 멀쩡했던 적이 있습니다.처음엔 물 주는 양이 다른가 싶어서 관수 호스부터 점검했는데, 원인은 물이 아니라 품종이었습니다. 갈색무늬병은 품종을 심하게 가리는 병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.갈색무늬병이란?갈색무늬병은 갈반병이라고도 부르며, 포도에서는 슈도세르코스포라 비티스라는 병원균이 원인입니다. 이 병원균은 불완전균의 일종으로 곤봉형이나 원통형의 분생포자를 만들어내는데, 이 포자가 빗물과 바람을 타고 잎에서 잎으로 옮겨 다닙니다.여기서 분생포자란 곰팡이가 무성적으로, 그러니까 ..
비 한 방울 안 왔는데 잎에 밀가루를 뿌려놓은 것 같다면, 그건 병이 아니라 관리 소홀의 증거일 확률이 큽니다.저도 처음엔 먼지인 줄 알고 손으로 쓱 닦아냈습니다. 그런데 다음날 보니 그 자리에 또 하얗게 올라와 있었습니다. 그게 흰가루병과 저의 첫 만남이었습니다.흰가루병이란 무엇인가흰가루병은 백분병이라고도 부르는데, 포도에서는 운시눌라 네카토르라는 병원균이 원인입니다. 요즘은 국제적으로 에리시페 네카토르라는 이름으로도 함께 불립니다.이 병원균의 특징은 노균병이나 탄저병과 달리 진짜 물기, 그러니까 잎 표면에 물방울이 맺혀있지 않아도 습도만 있으면 자랄 수 있다는 점입니다. 그래서 비 한 방울 안 오는 건조한 날씨에도 흰가루병은 얼마든지 번질 수 있습니다.저는 이 부분에서 제일 크게 착각했습니다. 장마철..
착색기에 장마가 겹치면 탄저병은 옵니다. 오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, 얼마나 넓게 오느냐의 문제입니다.저도 작년에 그걸 몸으로 배웠습니다. 이틀 연속 장맛비가 오고 난 다음날 아침, 포도알 표면에 검은 점 몇 개를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가 일주일 만에 한 줄을 통째로 잃었습니다.탄저병이란 무엇인가포도 탄저병은 예로부터 만부병이라고도 불렸는데, 병원균은 글로메렐라 신귤라타이며 불완전세대로는 콜레토트리쿰 글로에오스포리오이데스라는 이름으로 부릅니다.이름이 길고 복잡하지만 요점은 하나입니다. 이 균은 어린 열매에도 감염될 수 있지만 증상은 한참 뒤인 성숙기, 그러니까 포도알이 착색되는 시기에 가서야 나타납니다.이걸 잠복감염이라고 부르는데, 감염은 이미 초여름에 됐는데 증상은 8월 착색기가 ..
장마 끝나고 3일, 포도 잎 뒷면에 흰 곰팡이가 폈다면 이미 늦은 겁니다.그 시점에는 이미 포자가 사방으로 퍼진 상태라서, 약을 쳐도 이미 감염된 잎은 되돌릴 수 없습니다.노균병은 초기 며칠이 승부를 가르는 병이고, 저도 이 타이밍을 한 번 놓쳐서 한 구역을 통째로 잃어본 적이 있습니다.노균병이란 무엇인가노균병은 곰팡이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난균류라는, 진짜 곰팡이와는 계통이 다른 병원균에 의해 생기는 병입니다.포도에서는 플라스모파라 비티콜라라는 병원균이 원인인데, 이 병원균은 겨울 동안 낙엽이나 흙 속에서 난포자 형태로 버티다가 봄에 비가 오면 유주포자를 만들어 빗물을 타고 잎으로 튀어 올라 기공을 통해 감염을 시작합니다.여기서 기공이란 잎 뒷면에 있는 작은 숨구멍인데, 노균병균은 바로 이 구멍을 침입 ..